성매매 문제를 생각하면 보통 법과 도덕, 단속과 처벌의 프레임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김주희의 레이디 크레딧을 읽고 나면 시선이 확 바뀝니다. 이 책은 성매매가 단지 개인과 개인의 거래나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신용과 부채, 계약과 회수 같은 금융의 톱니바퀴 속에서 조직적으로 굴러가는 산업임을 보여 줍니다. 말 그대로 성매매의 얼굴 뒤에 있는 금융의 얼굴을 응시하게 하는 책입니다.
왜 ‘레이디 크레딧’인가
책 제목의 비유부터 흥미롭습니다. 신용을 하나의 인격처럼 상정하는 상상력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 저자는 그 형상을 빌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신용과 부채가 어떻게 사람의 시간을 담보로 잡고 삶의 선택을 줄 세우는지를 분석합니다. 성산업은 이 신용의 논리를 가장 잔혹하게, 그러나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장치로 묘사됩니다. 결국 누가 돈을 빌리고, 어떤 조건으로 갚으며, 못 갚으면 어떻게 회수되는지가 산업의 구조를 규정합니다.
핵심 개념 한눈에 보기
- 금융화된 성산업
성매매는 ‘수요가 있으니 존재한다’는 단순 논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선불비, 위약금, 소개비 같은 사실상의 금융상품이 산업의 혈관이 되고, 이 흐름을 관리하는 주체들이 수익을 극대화합니다. 결제 방식, 대출 구조, 계약서 조항은 모두 수익모델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됩니다. - 부채의 사슬
부채는 숫자만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생활비·꾸밈비·보증금 등 다양한 명목의 채무가 층층이 쌓이면서 개인은 산업에 포획됩니다. 겉으로는 ‘자발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산조차 어려운 구조적 강제가 작동합니다.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빚이 생기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 주체화의 아이러니
체계는 당사자를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 호명합니다. “갚아야 할 의무가 있으니 더 일하라.” 이 명령은 합리성의 언어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선택지를 줄이고 이동성을 봉쇄합니다. 신용평가, 연체 이력, 계약 위약금은 숫자의 옷을 입은 사회적 올가미가 됩니다.
읽으며 떠오른 장면들
이 책의 장점은 자극적인 사례 대신 구조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습니다. 영수증, 약정서, 정산표 같은 건조한 문서가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독자는 ‘감정’이 아니라 ‘기반’으로 문제를 이해하게 됩니다. 특정 업소나 사건의 파편적 풍문보다, 어떤 계약이 어떤 비용을 만들고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를 추적하는 분석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개인에 대한 연민보다 제도에 대한 질문이 커집니다.
정책과 현실 사이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나
첫째, 성매매를 지하경제의 문제로만 다루는 태도를 넘어야 합니다. 금융·노동·복지 정책의 교차점에서 선불비·소개비·위약금 같은 준금융 상품을 규제하고, 부채가 산업 포획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자발/강제’의 이분법을 넘어 부채가 만들어내는 강제의 형태를 정책 언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채무조정, 공공주거, 돌봄·소득 안전망은 성산업과 무관한 별개의 복지정책이 아니라, 산업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핵심 수단일 수 있습니다.
셋째, 결제·대출·플랫폼을 매개로 한 수익 구조를 투명화하고, 회수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위법을 실효적으로 제재해야 합니다. 금융감독과 노동감독의 경계에 걸친 회색지대를 흰색 혹은 검은색으로 정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책을 읽고 얻은 통찰
이 책은 성매매를 도덕의 문제로만 붙들어온 담론의 습관을 흔듭니다. 무엇이든 돈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책임과 해법의 자리가 달라집니다. 누가 빚을 지게 만들었는지, 누가 이자를 챙기는지, 누가 계약을 설계했는지를 묻는 순간, 개인의 수치심은 정책적 책임으로 치환됩니다. 독서 경험은 무겁지만, 동시에 명료합니다. 문제를 ‘사람 탓’이 아니라 ‘구조의 설계’로 바꿔 읽는 훈련을 하게 되니까요.
레이디 크레딧,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 현장성 있는 자료가 정책 제안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추천합니다. 학부생·활동가·정책가가 함께 읽고 토론하기 좋습니다. 금융·정책 용어가 낯설다면 속도를 조금 늦춰도 좋습니다. 책은 충분히 기다려 줍니다.
마무리
레이디 크레딧은 성매매를 둘러싼 오래된 질문을 새 언어로 다시 묻습니다. 신용, 부채, 회수, 담보라는 단어가 인간의 몸과 시간으로 번역되는 순간을 목격하면,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출구를 만드는 일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빚의 사슬을 끊는 정책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꾸준하고 설득력 있게 일깨워 줍니다.
출처
- 교보문고 도서 정보: 레이디 크레딧: 성매매, 금융의 얼굴을 하다, 현실문화, 2020.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023471
- 예스24 도서 소개.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1402209
- 네이버 시리즈 eBook 소개. https://series.naver.com/ebook/detail.nhn?productNo=5465213
- 한국여성학 서평(최별, 2020).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63973
- 비교문화 서평(이승철, 2022).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84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