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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대학교

교육의 이해 강의 수강 이전과 이후, 나의 교육관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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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 이전의 교육관 —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곧 교육'이라는 좁은 시야

이 강의를 듣기 전까지 나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누군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정해진 교과 과정에 따라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과목을 배우고, 시험으로 그 결과를 확인하며, 결국 더 좋은 상급 학교나 직장을 얻기 위해 거치는 제도적 과정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의 교육관은 '학교 교육' 자체를 곧 '교육'으로 등치시키는 매우 협소한 것이었고, 그 안에서도 교사 중심의 일방적 전수 활동을 가장 핵심적인 장면으로 떠올렸다.

이러한 시각은 자연스럽게 몇 가지 부수적인 믿음으로 이어졌다. 첫째, 교육의 성패는 학생의 성적과 진학 결과로 측정된다는 결과 중심의 사고였다. 둘째, 교사는 정답을 알고 있는 권위자이며 학생은 그 정답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위계적인 구도였다. 셋째, 교육은 학교에 다니는 일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시기가 끝나면 사실상 종료된다는 시간적 한계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생교육이나 사회교육 같은 개념을 들어도, 그것을 본격적인 교육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이 취미 삼아 하는 추가적인 학습 정도로 가볍게 여겨 왔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태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익히는 사회적 규범, 직장에서 선배에게 배우는 일머리 같은 것은 '교육'이라는 단어와 잘 연결되지 않는, 그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일상으로만 받아들였다.

또 한 가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교육을 '바람직한 인간을 만드는 작업'으로 보면서도 그 '바람직함'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질문해 본 적이 없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 학교가 제시하는 모범생 상, 부모님이 기대하는 자녀 상이 곧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막연히 받아들였을 뿐, 그 기준이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그것이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또한 교육의 효과를 짧은 시기에 측정 가능한 점수로 환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시험 한 번으로 평가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이나 사고의 깊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부족했다. 결국 강의를 듣기 이전의 나의 교육관은 학교라는 제도, 교사라는 권위자, 성적이라는 척도, 외부에서 주어진 인간상이라는 네 가지 축 위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강의에서 배운 핵심 개념과 변화의 계기

이러한 협소한 사고는 강의가 진행될수록 차곡차곡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충격을 준 것은 교육의 개념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교재와 강의는 교육을 기능적 관점, 규범적 관점, 그리고 주형(鑄型)과 성장과 만남이라는 비유적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기능적 관점은 교육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길러내고 문화를 전승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이고, 규범적 관점은 교육을 인간다움과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본질적 활동으로 본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거의 전적으로 기능적 관점에 치우쳐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특히 주형, 성장, 만남이라는 세 가지 비유는 나의 사고를 가장 크게 흔든 지점이었다. 주형의 비유는 교사가 미리 정해 둔 틀에 학생을 부어 일정한 모양을 찍어내듯 길러내는 모습이고, 이것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그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반면 성장의 비유는 식물이 햇빛과 물을 받아 자신의 본성대로 자라나듯, 학습자가 본래 가진 잠재력을 펼치도록 돕는 활동으로 교육을 그려냈다. 더 나아가 만남의 비유는 교육을 교사와 학생이 인격적으로 마주하여 서로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세 비유를 비교하며 나는 그동안 학생을 '빈 그릇'이나 '미완성 제품'으로 보아 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변화의 두 번째 계기는 교육학의 하위 분야들을 만난 일이었다. 교육철학은 '왜 가르치는가'라는 근본 물음을 끊임없이 되묻게 했고, 교육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가치 판단을 포함한 실천임을 알게 해 주었다. 교육사는 고대 그리스의 자유 교육, 중세의 종교 교육, 근대 공교육의 성립, 그리고 한국 전통 사회의 서당과 향교에 이르기까지, 교육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 왔음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학교라는 형태조차 사실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교육사회학은 교육이 사회 이동의 사다리이자 동시에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장치일 수 있다는 양면성을 일깨워 주었고, 평생교육론은 교육이 학교라는 공간과 청소년이라는 시기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활동임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개념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나는 교육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다양한 층위와 갈등이 들어 있는지를 비로소 보게 되었다.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는 동시에 비판하고, 개인을 길들이는 동시에 해방시키며, 지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도록 이끄는 모순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강의에서 다룬 듀이의 경험 중심 교육 사상과 피터스의 입문으로서의 교육 개념이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면서도 결국에는 학습자가 의미 있는 삶의 양식 속으로 능동적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공통의 지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교육은 결코 한 방향의 주입이 아니라, 가치 있는 활동에 학습자가 스스로의 의지와 이해를 가지고 참여하는 일이라는 통찰은, 나의 학습 태도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수강 이후의 새로운 교육관 — 평생에 걸친 만남과 성장의 과정

강의를 마친 지금 같은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나는 더 이상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좁은 답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교육이란 한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고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 가도록 돕는, 평생에 걸친 만남과 성장의 과정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 과정은 학교 안에서뿐 아니라 가정, 또래 집단, 일터, 지역사회, 그리고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한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경계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교사가 학생에게서 배우고 부모가 자녀에게서 깨우치며 동료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모든 장면이 교육적 사건이 될 수 있다.

또한 나는 이제 교육의 '바람직함'이라는 기준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회가 어떤 인간을 길러내려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함께 던지지 않는 교육은, 결국 기존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교육이 단지 비판으로만 끝나서도 안 되며, 학습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와 위로를 가져다주는 인격적 만남이어야 한다는 점도 깊이 새기게 되었다. 결국 이 강의는 나에게 답을 알려주었다기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다시 묻게 만드는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다. 이 변화는 앞으로 내가 교육학을 배워 나가는 모든 길목에서 가장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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