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로서 회사에서 코드 리뷰하다 보면 말 한마디, 변수 이름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는지 체감한다. 폭력은 꼭 주먹으로만 오는 게 아니더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덮고 나서, 나는 왜 이 작품이 내 일상과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는지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은 모방론(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이나 쾌락론(미적 즐거움 중심)보다 효용론(작품이 독자에게 일으키는 윤리적·정서적 변화와 효과)을 통해 읽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작품이 던지는 불편함이야말로 내 행동과 언어를 바꾸게 했기 때문이다.
세 관점 간단 정리
- 모방론: 예술은 현실(자연·인간·사회)을 재현한다는 관점
- 쾌락론: 예술의 목표를 미적 즐거움·카타르시스 같은 체험에 둠
- 효용론: 작품이 독자에게 실제 변화를 일으키는지(사유·행동·가치의 수정)를 중시
나는 독자의 능동적 수용과 변화에 방점을 찍는 효용론으로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1부 채식주의자: 경계 선언으로서의 거부 – 폭력의 냄새를 지우려는 시도
영혜가 처음 던지는 말은 선언문에 가깝다.
“고기 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
이 짧은 문장은 ‘왜 채식하느냐’가 아니라 ‘왜 폭력이 일상이 되었느냐’를 묻는다. 영혜의 감각은 생리적 거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윤리적 감지기로 작동한다. 회사 생활로 치면, ‘원래 다 이렇게 해’라는 말에 먼저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의 한마디와 닮았다. 규범의 익숙한 냄새를 의심하는 행위 말이다.
영혜의 꿈은 이 감지기의 기원을 보여준다.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깨는 순간 잊었어.”
기억은 흐릿하지만, 폭력의 흔적은 몸에 남는다. 이 장면은 현실의 정확한 재현(모방)을 넘어, 독자의 몸을 먼저 흔든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팀에 퍼져 있던 ‘말투 폭력’을 목록화해 슬랙 공지로 정리해 올렸다. 작품이 내 언어 습관을 바꿨다는 점에서 효용론의 효과가 분명했다.
생활의 차원으로 보면, 영혜의 실천은 이렇게 드라이하다.
“집에 있는 고기란 고기는 다 치우고.”
폭력의 근원이라 여긴 것을 치워버리는 물리적 정리. 개발자의 책상 위에서라면, ‘무심코 상처 주는 코드 리뷰 템플릿’과 ‘야근을 미화하는 회고 문구’를 지우는 일과 같다. 이 소설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의 레버를 당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효용론으로 읽는다.
3부 나무 불꽃: 인간이라는 종을 잠시 내려놓는 상상 – 무해함을 향한 급진적 이동
영혜의 언어는 나무의 언어로 기울어간다.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물구나무 서 있는 나무의 이미지는 세계를 거꾸로 보라는 신호다. 인간 중심의 시각을 뒤집고, 해를 주지 않는 생존 방식을 탐색한다. 내 일상으로 가져오면, 기능 추가보다 부작용 제거에 먼저 예산을 쓰는 의사결정, ‘성능’보다 ‘안전’ 커밋을 우선 머지하는 태도로 번역된다.
영혜는 마침내 생리적 욕구의 언어도 바꾼다.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섭취 대신 광합성의 은유를 선택하는 장면은 윤리적 욕구의 최소 단위를 묻는다. 직장에서의 나에게 이 문장은 ‘성과를 먹여 달라’가 아니라 ‘호흡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으로 들렸다. 스프린트마다 비워둔 회복 슬롯을 팀 규칙으로 넣은 것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그리고, 이 날카로운 질문.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삶의 당위를 자동으로 승인하지 않는 급진성. 효용론의 관점에서 이 문장은 독자에게 윤리적 시스템 콜을 강제한다. 팀 동료의 번아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던 내 습관이 이 대목에서 멈췄다. 우리는 스펙을 줄이고, 측정 지표에서 ‘초과근무 시간’을 명시적으로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감상 끝에 잊히지 않고, 조직의 규칙으로 스며들었다.
왜 효용론인가: 불편함이 행동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모방론으로도 채식주의자는 훌륭하다. 가부장제, 일상의 폭력, 신체의 정치학을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힘은 독자의 실천을 생성하는 데 있다. 쾌락론의 언어로는 이 불편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불편함이야말로 작품의 목적이 된다. 효용론은 이 불편함을 가치로 환원하고, 독자의 윤리적 선택(말투, 규칙, 작업 방식)의 변화를 핵심 성과로 본다. 내 경우, 다음이 달라졌다.
- 코드 리뷰 템플릿에서 비난 표현·비유적 폭력 표현을 제거
- 팀 운영 규칙에 회복 슬롯, 초과근무 상한, 피드백 언어 가이드 추가
- 데이터 삭제·비식별화를 ‘테크 부채’가 아니라 ‘필수 스펙’으로 격상
문학 텍스트가 내 업무 규칙에 직접 영향을 준 것, 이것이 바로 효용이다.
채식주의자는 불쾌한 작품, 그러나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이라고 본다.
채식주의자는 읽는 이를 편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 남고, 그래서 삶을 바꾼다. 모방론이 작품의 뼈대를 설명하고, 쾌락론이 문장과 이미지의 미학을 말해줄 수 있다면, 효용론은 이 작품이 독자의 삶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준다. 불편함을 감내하고 현실의 언어를 바꾸는 것.
그게 내가 이 작품에서 배운 가장 실용적인 방법론이다.
출처
- 효용론 개요: https://ko.wikipedia.org/wiki/효용론
- 문학 비평 전통 개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7699
- 작품 인용·해석 참고: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88486
- 작품 해석 보충: https://brunch.co.kr/@woodukerny/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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