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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의 역사 중세전기문학 제1기와 중세후기문학 제2기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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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은 단순한 연대적 분할이 아니라 문학을 둘러싼 사회적 토대, 작가층의 형성, 향유 방식의 변화, 갈래의 분화와 정착, 그리고 표기 체계의 변천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작업이다. 조동일의 시대구분은 고대문학, 중세전기문학, 중세후기문학, 근대 이행기 문학, 근대문학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 안에서 다시 각 시대를 세분하여 1기와 2기로 나누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구분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왕조 교체나 정치적 사건에 따라 시대를 잘라낸 것이 아니라, 한문학과 국문문학이 어떻게 공존하며 변화하였는지, 어떤 갈래가 새로 등장하고 어떤 갈래가 쇠퇴하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본 보고서에서는 중세전기문학 제1기의 양상과 중세후기문학 제2기의 양상을 작품·작가·문체·향유층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두 시기가 국문학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관한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1. 중세전기문학 제1기의 양상

중세전기문학 제1기는 통일신라 후반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시기, 대략 9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걸쳐 형성된 문학적 국면을 가리킨다. 935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정치적 격변이 이 시기의 외형을 규정하지만, 문학사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진행되어 온 한문학의 정착과 향가의 성숙, 그리고 새로운 문화권 형성의 흐름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고대문학의 신화적·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문자에 기반한 개인적 정서의 표현과 보편적 문명의 수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단계라는 점에서 중세적 성격을 갖는다.

1) 작품의 양상

중세전기 제1기의 대표적 작품군은 향가와 한문학 작품,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설화 및 역사 서술이다. 향가는 신라 진평왕대부터 고려 초까지 약 사백 년 동안 향유된 우리 고유의 정형시 갈래로, 현재 전하는 작품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등 총 25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적인 빈약함과 달리 그 문학적 깊이는 매우 풍부하다. 「제망매가」는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무상함과 종교적 위안을 응축된 비유로 그려 내고, 「찬기파랑가」는 인물의 인격적 향취를 자연 경물에 투사하여 형상화한다. 「처용가」는 무가적 색채와 서정적 깨달음이 결합된 독특한 작품이며, 「혜성가」와 「도솔가」는 주술적 기능과 정치적 기원이 결합된 향가의 한 갈래를 보여 준다. 균여의 「보현십원가」 11수는 향가의 마지막 단계에서 불교적 교리를 노래로 풀어낸 것으로, 향가가 단순한 서정시를 넘어 신앙적·공동체적 기능까지 수행하였음을 입증한다.

한문학 분야에서는 최치원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장 큰 봉우리이다. 「격황소서」는 당나라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쓴 격문으로 동아시아 한문학사에서 명문으로 회자되었고, 「추야우중」, 「제가야산독서당」 등의 시 작품은 중세 지식인의 고독과 좌절, 그리고 자연을 통한 자기 정화의 감각을 정밀하게 보여 준다. 그 외에도 박인범, 최승우, 최광유 등이 활동하여 신라 말 한문학의 다양성을 형성하였다. 산문 분야에서는 비문, 표문, 사찰 연기 설화 등의 한문 서술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설화와 역사 서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12세기에 편찬된 것은 시기적으로 다소 뒤이지만, 그 안에 수록된 신라 말기의 인물 열전과 잡지 기록은 제1기의 문학적·문화적 양상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는 비록 13세기 후반의 편찬물이지만, 향가 14수의 원문과 그 배경 설화를 함께 수록함으로써 이 시기의 작품을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게 한 결정적 자료가 된다. 두 책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속에 담긴 노래·신앙·민속의 흔적은 이 시기 문학의 다층성을 증언한다.

2) 작가의 양상

이 시기 문학의 담당층은 크게 세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화랑과 그 주변의 인물이다.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 「찬화랑가」 계열의 작가들은 화랑 집단의 윤리적 이상과 미적 감각을 향가로 형상화하였다. 둘째는 승려이다. 월명사, 융천사, 광덕, 영재, 그리고 후대의 균여에 이르는 승려 작가들은 향가를 종교적 의식과 결합시키며 그 갈래의 폭을 넓혔다.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가 노래를 통해 누이의 명복을 빌었다는 일화는 이 시기 향가가 가진 주술적 효력에 대한 당대인의 신념을 잘 보여 준다. 셋째는 도당 유학생 출신의 한문 지식인이다. 최치원, 최승우, 최광유 등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뒤 귀국하여 한문학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올렸으며, 동시에 신라의 골품제 한계에 부딪혀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이들의 한문 시문에는 동아시아 보편문명에 동참하려는 자부심과 본국에서의 정치적 소외감이 교차한다.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은 이 시기 문학이 광범위한 대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지식인 집단의 자기 표현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향가의 일부가 「서동요」와 같이 민요적 발상에서 출발하였다는 점, 그리고 「풍요」가 노동요의 성격을 띤다는 점은 작가층의 외연이 단일하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즉 표면적으로는 화랑·승려·문인이라는 지식인 집단이 중심이지만, 그 저변에는 민간의 노래와 신앙이 자양분으로 흐르고 있었다.

3) 문체의 양상

문체의 측면에서 중세전기 제1기는 두 개의 표기 체계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하나는 향찰을 통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향가의 문체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한문으로 작성된 시문의 문체이다. 향찰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의 어순과 어미를 그대로 살리는 표기 방식으로, 비록 한자를 매개로 하였지만 우리말의 율격과 정서를 보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제망매가」의 “생사 길은 /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와 같은 정서적 표현이 가능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분화되어 있었으며, 특히 10구체는 ‘아으’로 시작하는 낙구를 가짐으로써 정형성과 정서적 절정의 효과를 결합한 정교한 구조를 갖추었다.

한문 문체는 당대 동아시아의 보편적 문어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사륙변려문에서 고문으로 옮겨 가는 중국 문체의 변화에 비교적 빠르게 반응하였다. 최치원의 「격황소서」가 변려문의 대구와 운율을 활용한 것이라면, 그의 만년 시들은 보다 자유로운 율격과 개인적 정조를 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문과 표문은 의례적 격식을 갖춘 정중한 문체로, 산문 서술은 사실 기록과 설화적 흥미를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두 문체는 각각 ‘우리말의 정서’와 ‘보편문명의 격식’이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분담하며 공존하였다.

4) 향유층의 양상

향유층의 측면에서 보면, 향가는 본래 의식과 결합된 노래로서 화랑 집단, 사찰의 승려, 그리고 일부 민중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불리고 들렸다. 「도솔가」가 두 해가 나란히 떠오른 변괴를 진정시키기 위해 불렸다는 기록은 향가가 국가적 의례와 결합된 공적 향유의 대상이었음을 보여 주고, 「제망매가」가 누이의 49재에서 불렸다는 사실은 가족 단위의 의례적 향유의 흔적을 남긴다. 「처용가」가 무속과 결합되어 후대 고려 가요에까지 영향을 미친 점은 이 시기 노래가 일회적 작품이 아니라 의식과 풍속 속에서 반복적으로 향유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한문학은 향유층의 외연이 훨씬 좁았다. 한자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지식인, 즉 도당 유학생 출신과 일부 골품 귀족이 주된 독자였으며, 그 작품 역시 동아시아의 한문 지식인을 잠재적 청중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최치원이 자신의 시문을 당에 보내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유한 사실은, 신라 한문학이 처음부터 일국적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문학장 안에서 자리매김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향유층은 ‘민간과 결합된 향가의 향유자’와 ‘동아시아 문명권에 참여한 한문학의 향유자’라는 이중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5) 개인적 견해

중세전기 제1기를 살피면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이 시기가 우리 문학사가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는 사실이다. 고대문학이 신화와 집단적 정서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시기에는 「제망매가」와 같이 한 개인의 죽음을 응시하는 작품, 최치원의 시처럼 한 개인의 고독을 응시하는 작품이 가능해졌다. 즉 ‘개인의 발견’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보편 문명에 동참하는 한문학과, 우리말의 율격과 정서를 지키려는 향가가 동시에 발전함으로써 ‘이중언어 문학사’라는 우리 문학의 오래된 구조가 이때 확립되었다고 본다. 향찰이라는 표기 체계가 비록 후대에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도하였던 ‘우리말을 기록하려는 의지’는 훗날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문학의 발달로 이어지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중세후기문학 제2기의 양상

중세후기문학 제2기는 조선 전기, 즉 15세기 초에서 16세기 말에 이르는 약 이백 년의 시기를 가리킨다. 1392년 조선 건국과 1446년 훈민정음 반포, 그리고 16세기 사림의 등장과 성리학적 사유의 심화라는 큰 변화가 이 시기의 문학을 규정한다. 중세후기 제1기인 고려 후기가 새로운 갈래의 모색기였다면, 제2기는 그 모색이 ‘훈민정음’이라는 결정적 도구를 만나 본격적으로 결실을 거둔 시기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말 문학은 한문학과 동등한 자격으로 기록될 수 있는 표기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악장, 경기체가, 시조, 가사 등 다채로운 갈래가 정착되고 분화되었다.

1) 작품의 양상

조선 전기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편찬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다. 『용비어천가』는 1445년에 완성되고 1447년에 간행된 125장의 악장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노래하는 송축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훈민정음의 효용을 시험하는 실험적 작품이었다. 한자로 된 한시구와 우리말 노래가 짝을 이루는 그 형식은, 보편문명의 격식과 우리말의 가락을 동시에 살리고자 한 이 시기의 문화적 지향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진 불교 찬가로, 『석보상절』과 함께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의 본격적 문학 작품이다.

악장은 종묘제례나 국가의례에서 불리던 노래로서, 정도전의 「신도가」, 「몽금척」, 「수보록」, 권근의 「상대별곡」, 변계량의 「화산별곡」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은 새 왕조의 위업을 송축하는 공적 성격을 띠었기에 16세기 이후 점차 그 위상이 약화되었지만, 한자말과 우리말, 한문 시구와 노래 가락을 결합하는 양식적 실험은 이후 다른 갈래의 발전에 자극을 주었다.

경기체가는 고려 후기 「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갈래로, 조선 전기에 「상대별곡」, 「화산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으로 이어지며 한동안 활발히 향유되었다. 이 갈래는 한자어 명사구를 연속적으로 나열한 뒤 “위 ~ㅅ 경 긔 엇더하니잇고”라는 후렴구로 마무리하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사물과 풍경의 위용을 과시적으로 노래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그 과시적·열거적 성격은 점차 시조와 가사의 내면적·서정적 성격에 밀려 16세기 말 이후 쇠퇴하게 된다.

시조는 이 시기에 이르러 사대부의 대표적 서정 갈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는 사계절의 흥취를 평이한 어조로 노래한 강호한정가의 출발점이며, 이현보의 「어부가」는 어부의 삶을 빌려 자연에 은거한 사대부의 정신적 자유를 형상화한다. 이황의 「도산십이곡」은 학문의 즐거움과 자기 수양의 경지를 단아한 어조로 노래한 연시조로, 시조가 단순한 풍류의 노래가 아니라 사대부의 자기 정립의 양식임을 보여 준다. 이이의 「고산구곡가」 역시 자연 속에서 학문과 도학을 함께 추구하는 정신을 담은 대표적 작품이다. 한편 여류 시조의 영역에서는 황진이의 작품들이 빛난다.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은 인간의 감정을 절제된 형식 속에 농밀하게 응축한 명편으로, 시조 갈래의 표현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다.

가사는 시조보다 긴 호흡으로 풍경, 여정, 정치적 좌절, 도학적 사유 등을 풀어낼 수 있는 갈래로, 정극인의 「상춘곡」을 그 효시로 본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자연 속 정자에서의 한적한 흥취를 노래하였고, 정철에 이르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명편이 잇따라 등장하여 가사의 문학적 수준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렸다. 「관동별곡」은 관동 지방의 풍경 유람을 통해 사대부의 정신적 이상을 노래하고,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임금에 대한 충정을 여성 화자의 목소리에 가탁하여 표현한 우의적 가사이다. 박인로 역시 「누항사」, 「선상탄」 등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의 시대의식을 가사 형식 안에 담아냈다.

한문학의 영역에서도 이 시기는 풍성하였다. 서거정의 『동문선』은 우리 한문학의 정수를 집대성한 시문집으로,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의 작품을 폭넓게 수록함으로써 한문학사의 자기 정리 작업을 수행하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한문 단편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인간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결합시킨 빼어난 작품이다. 시문 분야에서는 김종직, 이황, 이이, 정철, 박인로 등이 한시와 산문에서 각기 다른 색채의 성취를 보였다.

음악과 문학의 결합을 정리한 저작으로 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1493)도 이 시기의 중요한 산물이다. 『악학궤범』은 궁중 음악과 노래의 가락, 의식 절차, 악기 편성 등을 종합적으로 기술하면서 「정읍사」, 「동동」, 「처용가」, 「정과정」 등 고려가요의 일부를 수록함으로써, 이전 시대의 우리말 노래가 조선 전기까지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의 가집과 악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 작가의 양상

이 시기 문학의 담당층은 크게 왕실과 관각문인, 사림 문인, 여류 작가, 그리고 방외인이라 부를 만한 주변적 지식인으로 나눌 수 있다. 세종, 세조 등의 왕실 인물과 정도전, 권근, 변계량, 서거정 등 관각문인들은 새 왕조의 정통성을 노래하는 악장과 송축 한시문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들의 문학은 국가 의례와 직접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공적이고 격식 있는 어조를 띠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사림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학의 중심도 사림 문인들에게로 옮겨 갔다. 이황, 이이, 조식, 송순, 정철, 박인로, 윤선도(말기) 등은 강호와 도학을 시조와 가사 양식 속에 결합하여 사대부 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단순한 풍류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학문, 정치적 좌절과 충정을 함께 담는 종합적 양식이었다. 「도산십이곡」의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앞에 있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한 학자의 학문관과 윤리관을 압축한 것으로 읽힌다.

여류 작가의 영역에서는 황진이가 시조와 한시 모두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고, 신사임당이 그림과 더불어 한시에서 단아한 작품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16세기 후반의 대표적 여성 한시인으로, 「규원가」가 그녀의 작품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나 어떤 경우에도 이 시기 여성 문학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이들의 등장은 사대부 남성 중심의 문학장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일정한 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방외인의 영역에서는 김시습이 단연 돋보인다. 그는 단종 폐위에 절망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방랑과 은둔으로 보냈으며, 그 좌절의 정조를 『금오신화』와 다수의 한시 속에 새겼다. 임제, 어무적 등도 정통 관료의 길에서 벗어난 위치에서 독자적 문학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방외인의 존재는, 조선 전기 문학이 단순히 체제 송축에 머무르지 않고 체제 바깥의 시선까지 포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3) 문체의 양상

문체의 차원에서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의 등장이다.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단지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말의 음운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표기 체계를 통해 ‘국문문학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향찰이 한자를 매개로 하여 우리말을 ‘에둘러’ 적었다면,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있는 그대로’ 적을 수 있도록 한 결정적 도약이었다. 그 결과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같은 본격적 우리말 작품이 등장하고, 시조와 가사가 문자로 정착되면서 구비전승의 한계를 넘어 보존과 확장의 길이 열렸다.

갈래별 문체의 특징을 보면, 악장은 송축의 격식에 어울리는 장중한 어조와 한자말의 비중이 높은 어휘 선택을 보이며, 경기체가는 한자어 명사구의 연속적 나열과 후렴구의 반복이라는 과시적·열거적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단형 정형 안에 정서를 응축하는 절제의 미학을 추구하며, 종장 첫 구의 음수율과 의미적 전환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짧은 호흡 안에서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가사는 3·4조 혹은 4·4조의 연속체 율격을 바탕으로 한 장형 시가로서, 풍경 묘사·서사·서정·논리적 진술을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유연한 문체를 갖추었다.

한문학의 문체 또한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 초의 관각문인들은 송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아 정중하면서도 명료한 산문 문체를 추구하였고, 16세기 사림 문인들은 그보다 더 개인적이고 사유적인 색채의 문체를 발전시켰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당전기(唐傳奇)의 영향 아래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는 서사 문체를 시도하였으며, 정철의 「관동별곡」이 한문 시문에서도 자주 인용된 사실은 가사의 명문 의식이 한문학의 미감과 통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 향유층의 양상

향유층의 측면에서 이 시기는 ‘이중적 문학장의 본격화’와 ‘여성·민중 향유의 확대’라는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보인다. 한문학은 여전히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에 가까웠지만, 우리말 문학은 그보다 훨씬 넓은 향유층을 확보하였다. 악장과 경기체가는 궁중과 관아의 공식 의례에서 향유되었고, 시조는 사대부의 사적 모임과 풍류의 자리에서 즐겨 불렸으며, 가사는 비교적 평이한 어휘와 율격을 통해 사대부의 가족, 부녀자, 그리고 일부 민간 향유자에게까지 그 외연을 넓혔다. 「상춘곡」, 「면앙정가」, 「관동별곡」 같은 작품이 여러 이본으로 전해 내려온 사실은 그것이 폐쇄된 텍스트가 아니라 광범위한 필사와 낭송의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여성 향유자의 등장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규원가」 계열의 규방가사, 황진이와 같은 기녀 작가의 시조,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한시는 모두 여성 화자의 목소리와 여성 독자의 시선을 문학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하였다. 비록 여성의 문학 활동이 사회 전반에서 제약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도 일정한 영역이 형성되었다는 점은 이후 조선 후기 여성 문학의 발전을 예고하는 의미를 지닌다.

민중적 향유의 흔적은 잡가, 무가, 민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악학궤범』과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일부 노래는 본래 민간에서 향유되던 것이 궁중 음악으로 편입된 사례이며, 「처용가」, 「정읍사」, 「동동」 등 고려가요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어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향유의 두께 덕분이다. 그 결과 이 시기 문학은 ‘상층의 한문학 — 사대부의 우리말 문학 — 민중의 노래’가 위계적이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삼층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5) 개인적 견해

중세후기 제2기를 살피면서 가장 깊이 느끼는 점은, 이 시기가 ‘제도가 문학을 만든’ 시기이자 동시에 ‘문학이 제도를 견디고 넘어선’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분명 국가의 결정에 의한 제도적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하게 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은 어떤 제도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자율적 전개를 보여 주었다. 「용비어천가」가 새 왕조의 정당성을 노래한 공적 작품이었다면, 「사미인곡」은 좌천된 신하의 사적 충정을 우의화한 작품이었고, 황진이의 시조는 사대부 사회 바깥의 자리에서도 빛나는 미적 성취가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즉 동일한 시기에 ‘체제의 노래’와 ‘체제 바깥의 노래’가 함께 가능하였다는 점이 이 시기 문학의 두께를 만든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점은 자연을 다루는 시각의 깊이이다. 「강호사시가」, 「면앙정가」, 「도산십이곡」, 「관동별곡」 등은 모두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자 ‘이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인식한다. 자연은 도학적 이치가 구현되는 공간이자 정치적 좌절을 위로하는 공간이고, 동시에 미적 향수의 대상이다. 이러한 다층적 자연관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우리 문학이 ‘자연을 통한 자기 인식’이라는 보편적 문학 주제에 깊이 도달하였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중세전기 제1기와 비교할 때 이 시기의 가장 큰 차이는 ‘작가의 자기 의식’이다. 향가 시기의 작가가 종교적·의례적 기능 안에서 자기를 표현하였다면, 조선 전기의 작가는 학문, 정치, 윤리, 자연, 사랑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보다 분명한 ‘나’의 목소리로 자기를 드러낸다. 이 ‘나’의 등장은 근대 이후 문학의 자아 중심성과는 다른 결을 가지지만, 그 안에 이미 근대 이행기를 향한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후기 제2기는 우리 문학사의 ‘성숙한 중세’이자 동시에 ‘근대로 가는 길목의 출발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중세전기 제1기가 향가와 한문학의 공존을 통해 우리 문학사의 이중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면, 중세후기 제2기는 훈민정음의 등장과 사림의 성장 위에서 그 이중적 토대를 더욱 입체적으로 확장한 시기였다. 두 시기는 시간적으로 약 오백 년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우리말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 자연과 인간을 함께 사유하는 시선, 그리고 한문학과 우리말 문학을 동시에 가꾸어 온 이중언어적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깊이 이어져 있다. 국문학사의 역사가 단절과 비약의 연속이 아니라, 길고 끈질긴 축적의 결과임을 이 두 시기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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